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변명을 해 두자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다가 내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닌 이십대 남성 가운데에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몹시 드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한달에 두세번씩 들여다 보고 있는 돌잡이 조카가 있어서 어렴풋이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당연하게도 온전히 내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테고.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사실 매우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그런 감정들... 이를테면 '초보 부모의 감정들' 이 있는 탓에 스스로를 적잖이 한정짓고 관람을 시작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도 거칠게 묘사가 되긴 했지만 처음 엄마, 아빠가 된 사람들의 감정이란 게 생각만큼 단순한 게 아니었던 탓이다. 무작정 사랑으로 가득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원망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니, 이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이기 전에 내가 먼저 생각한 것은... 뭐가 되었든 내가 섣불리 이해했다고 떠벌일 수 있는 감정은 아니란 것 정도? 열린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방해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조금은 경계에 선 사람의 입장에서 보게 되었달까.

 

- 많은 사람들이 '모성의 해체' 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고, 또 감독이나 원작자의 의도도 그 방향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많은 남성들에게는 사실 충격적일 수도 있는 말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니! 하지만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산모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다른 무엇보다 '징그러움' 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진 감상평(?)이기도 하고... 자라나는 아이가 세상 무엇보다 악마에 가깝다는 점은 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의 상당부분이 사랑보다는 책임감에 가깝다는 점에 굳이 두 번 놀랄 필요는 없을 것도 같다. 무방비상태의 생명을 거친세상에 내어놓았을 때에는 그 생명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뒤를 돌봐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뭐 그 뻔한 책임감 말이다. 하지만 단지 책임감만으로 그 오랜 세월을 견뎌오는 데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 상대가 애가 됐든 어른이 됐든 감정과 관계는 주고받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이 연쇄가 어디선가 비틀렸을 때 비극은 시작된다. 이 영화는 서로에게 보답받지 못한 채 평행선으로 내달리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기본 틀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별로 변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저 프로그램을 꾸준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언제나 부모다. 부모의 양육방식이 잘못됐거나, 생활태도가 잘못됐거나, 여하튼 부모에게서 뭔가 비틀린 감정이 전달되었을 때 아이는 비뚤어진다. 다만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는 부모 선에서 모든 상황을 제어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황이 제시되는 반면 <케빈에 대하여>의 경우에는 그게 그렇지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건조한가? 하지만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입장에서 바라볼 때 말썽쟁이 케빈과 살인마 케빈은 정확히 같은 지평에 서 있는 캐릭터다. 영화 속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고 부모에게 책임을 돌리듯, 케빈의 부모에게 (너무나도 쉽게) 사태의 책임을 돌려버린다. 그런데, 이게 적절한 건가?

 

- 이 영화는 극단적이다. 모성은 선천적이지 않다. 하지만 말도 못하는 아이를 앉혀놓은 채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 고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별로 없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때 많은 이상 증상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마가 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 괴리를 메우는 것은 어찌됐건 '일어난 일' 들에 대한 감정적, 현실적 책임을 지고 있는 에바의 잔인한 일상이다. 이 일상에서도 굳이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기보다는 불길한 소리, 불길한 색깔, 불길한 표정연기(;)같은 것들이 대부분의 설명을 대신하는데, 좀 안좋게 말하자면 내러티브 외적인 요소로 '퉁치려고' 한다... 고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설명이 불충분한 건 아니다. 별로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유독 이 영화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조금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 가공할만한 감정적 격량에 부응하는 설명을 붙여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엘리펀트>를 닮았다.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여기저기서 살펴보는 <엘리펀트> 역시도 별다른 주석을 붙이지 않은 채 피비린내 나는 결말을 터트려 버렸다. 사실 <엘리펀트>의 시도는 그 모든 설명들이 모두 다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폭력의 연쇄고리를 타고 올라가 건조하게 그 책임을 살피기 이전에, 당장 이 자리에서 희생된 학생들에게 뜨거운 애도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 <엘리펀트>의 의도였다 (고 나는 생각한다). <케빈에 대하여>역시도, 정확히 같은 시도를 통해 바로 지금 괴로운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에바에게 집중하고자 한다. 나에게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고, 내 아이가 악마였을 수도 있다. 그게 뭐 중요하단 말인가? 에바는 영화 내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붉은 페인트를 벗겨낸다. 그리고 교도소를 찾아간 에바는 왜 그랬는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는 케빈을 뜨겁게 안아주고 집으로 돌아와 방을 정리한다. 방에는 둘 사이에 단 한 번 있었던 소통의 매개체이자 대학살의 시발점인 <로빈후드>가 놓여 있다. 에바가 그 책을 어디론가 던져버리거나 불태우지 않고 가지런히 옷장 위에 올려놓을 때, 아직 에바의 내부에서도 케빈을 이해하고 받아들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결론짓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희망적이고, 어쩌면 잔인한 현재진행형으로 막을 내린다.

 

- 결론만 말하자면 그다지 인상적인 영화는 아니었다. 아마도 시작할 때 말해둔 '한정짓기' 가 좀 안좋은 영향을 미쳤던 것도 같고... 실은 지나치게 막나가는 주인공들과 상황이 좀체 맘속에 와 닿지 않았던 탓이 크다. 에바나 케빈이나, 에바 남편이나 길거리에서 에바 뺨 때리고 지나가던 아주머니까지 정말 그 누구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렇게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사람들이 열명만 더 있어도 세상 정말 피곤하겠구나... 싶었고. 앞서 말한 <엘리펀트>의 경우에는 왜 안 그랬나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실제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좀 체감이 달랐던 듯.

 

- 아, 음악이 참 좋았다. 이렇게나 직설적인 영화음악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