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영화/9월의 영화 2012. 10. 7. 05:29

'피에타'의 다섯 가지 키워드

이강도

  피도 눈물도 없이 매정한 존재를 당신은 뭐라고 부를 것인가? 냉혈한? 악마? 괴물?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존재를 당신이 뭐라고 부르든 사실 큰 상관은 없다. 그 호칭은 우리 사이에서만 유의미할 뿐, 그 존재는 당신이 붙인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피에타’를 보며 이강도에게 당신이 정한 호칭을 붙이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그는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이다. 단순히 피도 눈물도 없는 게 아니라, 증오도 분노도 없으며 심지어 쾌락과 욕망도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압도적인 힘과 뚜렷한 할 일이다.

  물론 그는 숨쉬고 먹고 자는 동물이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는 체념한 인간이다. 이강도의 채무자 부인은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일주일의 기한만 달라’며 속옷 바람으로 이강도 앞에 서지만 이강도는 그녀를 몇 대 때리곤 그가 할 일, 채무자의 손을 짓뭉갠 후 유유히 떠난다. 그에게 욕망은 자신을 흔들리게 할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그의 동물로서의 욕망은 잠을 자며 무의식중에 하는 마스터베이션으로 충분하다.


신체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보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관객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잔인함이다. 그의 이야기는 완충지대 없이 신체를 곧바로 관객에게 들이댄다. 무엇보다도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건 아무런 외피 없이 카메라를 통해 그대로 배달된 신체가 코앞에서 유린당하고 난도질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체는 욕망의 공간이자 기호이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당연히 감추거나 더할 것 없이 그의 앵글은 신체로부터 비롯하며 역시 당연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불편함 없이 보기란 불가능하다.

  ‘피에타’에서도 역시 이강도는 등장인물들의 신체를 유린하고 난도질한다. 신체는 욕망의 공간이지만, 강도에게 욕망은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고장에 불과하다. 단순한 논리로 강도에게 신체는 빈 것이 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는 어떤 짓을 해도 아무 것도 아니므로 강도는 채무자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짓뭉개는데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이 백날 이강도에게 악마라고 불러도 냉혈한이나 괴물이라고 불러도 이강도에게는 아무 것도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강도에게 신체가 공백이기에 훼손 가능한 대상이라지만, 채무자들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채무자들의 신체는 훼손 가능한 대상이 되는가? 아주 당연하고도 무시무시하게, 이강도와 채무자들을 연결하는 것은 돈이다. 이강도는 채무자의 신체를 절단하여 타는 보험금으로 사채 빚을 받아낸다. ‘지옥에 떨어져 불구덩이에 타죽을 악마’라는 채무자의 저주에 이강도는 이렇게 응수한다. ‘빌린 돈 안 갚을 생각을 하는 네 놈들은?’

  이강도의 자본주의가 비웃음당할 만한 것인지 채무자의 인간윤리가 비웃음당할 만한 것인지, 강도는 아주 당당하게 채무자에게 되묻는다. 신체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며, 신체를 사용하여 돈으로 교환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신체를 사용’이라는 구절의 활용 범주를 조금 더 늘려본들 어떠하겠는가? 이강도에겐 신체를 절단하여 보험금을 타 사채를 갚는 것은 ‘신체를 사용’이라는 구절이 가진 논리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신체를 돈으로 환원한다.


엄마

  이 신체와 돈의 연쇄 고리는 어느 쪽에서도 끊을 수가 없다. 이강도에게는 이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야할 필요성과 계기가 결여되어 있으며, 자본의 논리에 갇혀 버둥대는 채무자들에게는 일종의 필요악이 되어버린, 벗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이다.

  채무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가지이다. 이강도를 그저 욕하고 원망하거나, 이강도의 영향력 밖이자 존재의 범위 밖으로 달아나거나, 오히려 이강도의 논리에 아주 강하게 호응하여 자신의 신체를 자신이 절단하거나. 이 선택지들은 행렬의 결과물인데, 이강도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선택지는 적극적이거나 울며 겨자 먹기일 수 있다. 반면에, 이강도라는 현실을 벗어나는 순간 선택지는 사라진다. 비어있는 행렬, 이강도는 엄연한 현실이며, 벗어날 수 없다.

  이 공백의 행렬을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그리고 엄마가 등장한다. 30년 만에 나타난 엄마라는 존재는 이강도의 세계를 유리창 깨듯 깨버린다. 이강도의 세계에는 엄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강도의 세계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엄마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 때려도, 협박해도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부분을 먹여도 보고 최후의 방법으로 성적 위협도 해보지만 엄마는 꿈쩍도 않는다. 공백의 행렬에서 공백을 채우는 존재가 나타났다. 이강도의 현실 밖에 존재하면서 이강도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는 사람, 엄마. 영화는 이렇게 '피에타'를 호출한다.


복수

  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어머니의 존재를 각인하기 위한 상징으로 21세기까지 반복하여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 영화의 피에타는 또 다르다. 이 성모 마리아가 이강도에게 접근한 이유가 그녀가 그의 엄마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 아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강도는 사라진 엄마를 찾기 위해,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대상이었던 채무자들을 다시 찾아간다. 그의 엄마를 찾는 여정에서 실제로 그가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들이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죽거나 묵묵히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이강도를 만나서도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이강도의 세계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들은 다르다.
  복수는 이루어진다. 엄마는 폐건물에서 뛰어내린다. 스스로 목숨을 저버림으로써 복수를 완성한다. 이강도가 무릎을 꿇고 엄마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그녀는 그를 애달프게 내려다본다. 그녀의 아들만큼이나 이강도 역시 불쌍하다며, 어떡해야 하냐며. 슬피 운다. 하지만 그녀는 뛰어내린다. 돌아갈 길은 없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복수의 주체 자리는 비어있다. 이강도도, 엄마도, 채무자들도 행해진 복수의 수혜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복수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복수의 의미는 어디로 향하는가?


다시 엄마

  이강도가 엄마를 찾으러 다니며 다시 만나는 채무자들은 여전히 이강도의 세계 안에서 살지만, 이강도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세계에서 살지 않는다. 그에게 남은 결론은 자살만이 유일하다. 자신의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채무자들은 칼을 갈지만 휘두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세계의 밖으로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나온, 그러나 엄마 잃은 외톨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는 자신의 손으로 짓뭉갠 채무자의 삶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이제 그는 냉혈한이고 악마이고 괴물이다.
  마지막으로, 복수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자. 엄마가 뛰어내리기 전에 카메라는 다른 엄마를 비춘다. 그녀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나타났고 자결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이강도의 엄마를 건물에서 떠밀려 한다. 다만 다른 엄마는 이강도의 엄마를 떠밀 수 없다. 사실 복수는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는 복수를 하기 위해, 이 절망적인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 속에서는 이강도도, 엄마도, 채무자도 수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강도가 만들어 둔 세계, 아니 이강도가 스스로 체화한 세계의 안팎으로 왕복할 수 있는 존재를 감독은 질문하고 대답한다. 피에타는 이렇게 세상이라는 깊은 절망 속에서 아주 잠시, 드러난다.

케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케빈에 대하여, 2011)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20대 중후반 무렵, 인생의 과도기에 서있다 보니 주변에 개명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사후에 붙여지는 묘호도 아니고 삶을 시작할 때 붙이는 사람 이름인데도 삶은 이름을 따라간다고들 한다. 물론 철학관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정도로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 이름이 그러할진대, 촬영을 다 끝내고서 확정되는 영화 제목이야 오죽할까. 그만큼 제목은 영화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 간단하게 ‘슈퍼맨’에서 배트맨을 보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이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직역하자면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해요.’ 정도이려나. 만약 케빈이라는 소년의 모험을 다룬 판타지 영화라면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 이야기’ 정도가 되었어야 했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케빈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라면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정도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에 ‘케빈의 모험’이나 ‘케빈의 일대기’와 같은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자’이다. 영화의 제목이 영화를 축약하지 않는다. 제목은 말을 걸고 있다. 우리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다만 주의하자. 케빈에 대하여 말해본다는 것은 케빈이라는 범죄자를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가를 논하자는 말은 아니다. 케빈의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케빈의 존재는 우리 능력 밖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케빈에 대하여 말하려면 그의 존재라는 사건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여기 케빈이라는 괴물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 새 책이 나오면 사인회를 할 정도로 꽤 유명한 여행가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케빈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 물론 그녀도 여러 번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첫 번째 의미를 가진다.

  에바와는 달리 에바의 남편도, 두 번째 자녀인 딸도 케빈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녀가 케빈에 대하여 말하거나 말하려고 하면 그녀의 남편은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자라는 것이라고, 에바가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뿐이다. 그녀의 딸 역시 케빈을 졸졸 쫓아다니며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즐거워한다. 에바는 분명히 케빈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에게, 딸에게 분명히 전달하지 못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가였다. 그러다 덜컥 아이를 가졌고 그렇게 케빈을 낳고 기르며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했다. 그 희생을 케빈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지 않는지 그녀는 스스로 의심해야 한다. 마음의 안식처로 만든 자신의 방에 물총을 난사한 케빈 앞에서 화를 참지 못했던 장면, 이것이 그녀가 케빈에 대하여 강하게 주장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러한 의심을 불러오는 보다 원천적인 기제, 바로 엄마에게 주어지는 애정과 모성의 역할이다. 차라리 도로 공사장 소음에 기대어 아이의 울음소리로부터 안식을 얻는 장면,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하며 답답함을 억지로 내리누르는 장면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모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성의 역할과 행동은 이미 주어져 있다. 이 분명하지만 말할 수 없는 괴리가 그녀의 두 번째 이유이다.

  그러한 의심과 괴리로 에바는 케빈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수도 없이 포기한다. 그리고 결국 케빈은 살인을 저지른다. 자물쇠로 문을 잠궈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활을 난사한다. 학교에서 일을 치르기 전에 아버지와 여동생도 죽인다. 오직 에바만이 살아남는다. 케빈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에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살인의 이유가 에바가 아닌 것은 그녀가 괴물을 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바가 비록 양육에 서투르고 어머니 역할에 충실할 순 없었지만, 케빈을 괴물로 길러낸 것은 아니다. 동시에 살인의 이유가 에바인 것은 그녀가 케빈의 정체를 의심하고 경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심과 괴리에 묶여 케빈에 대하여 정확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케빈의 살인 사건 이후 그녀의 사회적 삶은 송두리째 무너진다. 사인회를 하던 유명한 여행가는 여행사 잡무 일자리에도 송구해하며, 이웃의, 피해자 가족의, 직장동료의 모욕적인 행동에도 대꾸조차 할 수 없다. 케빈 문제를 제외하곤 특별한 부부싸움 조차 하지 않았던 남편도, 그녀를 잘 따랐던 씩씩한 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간다.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두 번째 의미를 갖는다.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2년 째 되는 날,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왜 그랬느냐고. “그 당시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케빈의 답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원천인 에바의 사회적 성공, 따뜻한 가족인척하려는 상투적인 저녁 식사, 억지로 즐거운척하는 여가활동까지, 케빈은 에바의 모든 행동을 우습게 여겼다. 그녀의 그러한 세상을 비웃고자, 무너뜨리고 승리하고자 그는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너뜨렸지만 승리하지는 못했다. 에바가 지옥같은 삶 속에서도 모진 목숨을 이어가며 그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말로 케빈은 절대 알 수 없다.

  에바는 오히려 케빈의 살인 사건으로 자기 안의 의심과 자기 안팎의 괴리를 떨쳐낸다. 아니 떨쳐낸다기 보단 의심할 필요가 없고 괴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모성 아닌 모성을 발견한다. 그것에는 모성보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그리고 책임은 빨간색 페인트로, 길에서 마주치는 피해자로 계속 바뀌어가며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그녀가 묵묵히 빨간색 페인트를 벗겨내는 것, 피해자 가족이 으깨놓은 계란으로 스크램블을 해먹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가 새로 발견한 모성 아닌 모성,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지는 책임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따라가며 에바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은 관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것은 에바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책임이 자신의 것인 마냥 짊어지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모욕당하고 손가락질 당하지만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과연 그녀에게 양육의 책임을 돌려야 하는가? 그녀에게 지워진 책임은 정말 그녀의 책임인가? 우리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래서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앉아서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영화이다. 카메라는 에바를 따라다니지만 절대 그녀를 편들진 않는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어머니라고 하기엔 미흡한 존재, 아이를 향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서슴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형식적인 모자 외출에 흡족해하는 모습은 낯설고 피곤하다. 그렇다고 책임 속에 살아가는 에바를 바라보는 것이 통쾌하지도 않다.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는 걸음걸이,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조심스러운 관찰, 일어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 모습 역시 안쓰럽고 피곤하다. 그렇게 상영시간 내내 우리는 에바의 삶으로 시달리고 만다. 이 영화를 보고 피로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피로는 이제 우리의 삶으로 이식된다. 당신이 여성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모성을 되묻는 것 이상의 질문을 영화는 우리에게 던진다. 당신은 진실을 바라볼 자신이 있는가. 바라보고 마주하고,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에바가 마주하고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진실과, 에바가 마주하고 버티어내는 케빈의 진실은 우리가 분유(分有)하고 있는 진실이다. 그렇게 영화의 제목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다가온다.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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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영화가 어떤 부분에서는 오이디푸스와 같아 보이는데, 엄마 혼자 살아남았다는 점, 어렸을 때 부모의 성행위를 발견했다는 부분에선 얼추 맞아떨어지지만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케빈이 벌인 살인의 목적이 엄마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엄마와의 경쟁과 승리에 더 가깝고. 결국 이 영화에서 케빈은 불가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케빈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

  (확실히 힘든 영화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도 조금 쉬다가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느니 하는 쉬운 평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12:00에서 12:01로 넘어가는 자명종 시계다. 무얼 상징하는 것일까? 아, 힘들다고 추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본 후의 일과를 짜두면 알차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변명을 해 두자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다가 내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닌 이십대 남성 가운데에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몹시 드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한달에 두세번씩 들여다 보고 있는 돌잡이 조카가 있어서 어렴풋이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당연하게도 온전히 내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테고.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사실 매우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그런 감정들... 이를테면 '초보 부모의 감정들' 이 있는 탓에 스스로를 적잖이 한정짓고 관람을 시작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도 거칠게 묘사가 되긴 했지만 처음 엄마, 아빠가 된 사람들의 감정이란 게 생각만큼 단순한 게 아니었던 탓이다. 무작정 사랑으로 가득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원망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니, 이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이기 전에 내가 먼저 생각한 것은... 뭐가 되었든 내가 섣불리 이해했다고 떠벌일 수 있는 감정은 아니란 것 정도? 열린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방해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조금은 경계에 선 사람의 입장에서 보게 되었달까.

 

- 많은 사람들이 '모성의 해체' 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고, 또 감독이나 원작자의 의도도 그 방향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많은 남성들에게는 사실 충격적일 수도 있는 말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니! 하지만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산모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다른 무엇보다 '징그러움' 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진 감상평(?)이기도 하고... 자라나는 아이가 세상 무엇보다 악마에 가깝다는 점은 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의 상당부분이 사랑보다는 책임감에 가깝다는 점에 굳이 두 번 놀랄 필요는 없을 것도 같다. 무방비상태의 생명을 거친세상에 내어놓았을 때에는 그 생명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뒤를 돌봐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뭐 그 뻔한 책임감 말이다. 하지만 단지 책임감만으로 그 오랜 세월을 견뎌오는 데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 상대가 애가 됐든 어른이 됐든 감정과 관계는 주고받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이 연쇄가 어디선가 비틀렸을 때 비극은 시작된다. 이 영화는 서로에게 보답받지 못한 채 평행선으로 내달리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기본 틀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별로 변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저 프로그램을 꾸준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언제나 부모다. 부모의 양육방식이 잘못됐거나, 생활태도가 잘못됐거나, 여하튼 부모에게서 뭔가 비틀린 감정이 전달되었을 때 아이는 비뚤어진다. 다만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는 부모 선에서 모든 상황을 제어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황이 제시되는 반면 <케빈에 대하여>의 경우에는 그게 그렇지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건조한가? 하지만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입장에서 바라볼 때 말썽쟁이 케빈과 살인마 케빈은 정확히 같은 지평에 서 있는 캐릭터다. 영화 속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고 부모에게 책임을 돌리듯, 케빈의 부모에게 (너무나도 쉽게) 사태의 책임을 돌려버린다. 그런데, 이게 적절한 건가?

 

- 이 영화는 극단적이다. 모성은 선천적이지 않다. 하지만 말도 못하는 아이를 앉혀놓은 채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 고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별로 없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때 많은 이상 증상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마가 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 괴리를 메우는 것은 어찌됐건 '일어난 일' 들에 대한 감정적, 현실적 책임을 지고 있는 에바의 잔인한 일상이다. 이 일상에서도 굳이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기보다는 불길한 소리, 불길한 색깔, 불길한 표정연기(;)같은 것들이 대부분의 설명을 대신하는데, 좀 안좋게 말하자면 내러티브 외적인 요소로 '퉁치려고' 한다... 고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설명이 불충분한 건 아니다. 별로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유독 이 영화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조금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 가공할만한 감정적 격량에 부응하는 설명을 붙여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엘리펀트>를 닮았다.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여기저기서 살펴보는 <엘리펀트> 역시도 별다른 주석을 붙이지 않은 채 피비린내 나는 결말을 터트려 버렸다. 사실 <엘리펀트>의 시도는 그 모든 설명들이 모두 다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폭력의 연쇄고리를 타고 올라가 건조하게 그 책임을 살피기 이전에, 당장 이 자리에서 희생된 학생들에게 뜨거운 애도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 <엘리펀트>의 의도였다 (고 나는 생각한다). <케빈에 대하여>역시도, 정확히 같은 시도를 통해 바로 지금 괴로운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에바에게 집중하고자 한다. 나에게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고, 내 아이가 악마였을 수도 있다. 그게 뭐 중요하단 말인가? 에바는 영화 내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붉은 페인트를 벗겨낸다. 그리고 교도소를 찾아간 에바는 왜 그랬는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는 케빈을 뜨겁게 안아주고 집으로 돌아와 방을 정리한다. 방에는 둘 사이에 단 한 번 있었던 소통의 매개체이자 대학살의 시발점인 <로빈후드>가 놓여 있다. 에바가 그 책을 어디론가 던져버리거나 불태우지 않고 가지런히 옷장 위에 올려놓을 때, 아직 에바의 내부에서도 케빈을 이해하고 받아들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결론짓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희망적이고, 어쩌면 잔인한 현재진행형으로 막을 내린다.

 

- 결론만 말하자면 그다지 인상적인 영화는 아니었다. 아마도 시작할 때 말해둔 '한정짓기' 가 좀 안좋은 영향을 미쳤던 것도 같고... 실은 지나치게 막나가는 주인공들과 상황이 좀체 맘속에 와 닿지 않았던 탓이 크다. 에바나 케빈이나, 에바 남편이나 길거리에서 에바 뺨 때리고 지나가던 아주머니까지 정말 그 누구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렇게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사람들이 열명만 더 있어도 세상 정말 피곤하겠구나... 싶었고. 앞서 말한 <엘리펀트>의 경우에는 왜 안 그랬나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실제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좀 체감이 달랐던 듯.

 

- 아, 음악이 참 좋았다. 이렇게나 직설적인 영화음악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