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케빈에 대하여, 2011)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20대 중후반 무렵, 인생의 과도기에 서있다 보니 주변에 개명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이들이 많아진다. 사후에 붙여지는 묘호도 아니고 삶을 시작할 때 붙이는 사람 이름인데도 삶은 이름을 따라간다고들 한다. 물론 철학관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정도로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 이름이 그러할진대, 촬영을 다 끝내고서 확정되는 영화 제목이야 오죽할까. 그만큼 제목은 영화의 많은 것을 설명한다. 간단하게 ‘슈퍼맨’에서 배트맨을 보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이 영화의 원제는 ‘We need to talk about Kevin’, 직역하자면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해요.’ 정도이려나. 만약 케빈이라는 소년의 모험을 다룬 판타지 영화라면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 이야기’ 정도가 되었어야 했고,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케빈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라면 이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정도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감독은 이 영화에 ‘케빈의 모험’이나 ‘케빈의 일대기’와 같은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영화의 제목은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자’이다. 영화의 제목이 영화를 축약하지 않는다. 제목은 말을 걸고 있다. 우리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다만 주의하자. 케빈에 대하여 말해본다는 것은 케빈이라는 범죄자를 어떻게 처분해야 하는가를 논하자는 말은 아니다. 케빈의 존재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든,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케빈의 존재는 우리 능력 밖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케빈에 대하여 말하려면 그의 존재라는 사건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여기 케빈이라는 괴물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 새 책이 나오면 사인회를 할 정도로 꽤 유명한 여행가이다. 그런 그녀에게도 쉽게 말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자신의 아들인 케빈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 물론 그녀도 여러 번 ‘케빈에 대하여 말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번번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첫 번째 의미를 가진다.

  에바와는 달리 에바의 남편도, 두 번째 자녀인 딸도 케빈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녀가 케빈에 대하여 말하거나 말하려고 하면 그녀의 남편은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게 자라는 것이라고, 에바가 이해해야 하는 것이라고 할뿐이다. 그녀의 딸 역시 케빈을 졸졸 쫓아다니며 자신을 무시하는 것도 즐거워한다. 에바는 분명히 케빈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에게, 딸에게 분명히 전달하지 못한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가였다. 그러다 덜컥 아이를 가졌고 그렇게 케빈을 낳고 기르며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했다. 그 희생을 케빈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지 않는지 그녀는 스스로 의심해야 한다. 마음의 안식처로 만든 자신의 방에 물총을 난사한 케빈 앞에서 화를 참지 못했던 장면, 이것이 그녀가 케빈에 대하여 강하게 주장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러한 의심을 불러오는 보다 원천적인 기제, 바로 엄마에게 주어지는 애정과 모성의 역할이다. 차라리 도로 공사장 소음에 기대어 아이의 울음소리로부터 안식을 얻는 장면, 공을 주고받는 놀이를 하며 답답함을 억지로 내리누르는 장면에서 그녀는 스스로에게 모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모성의 역할과 행동은 이미 주어져 있다. 이 분명하지만 말할 수 없는 괴리가 그녀의 두 번째 이유이다.

  그러한 의심과 괴리로 에바는 케빈에 대하여 말할 기회를 수도 없이 포기한다. 그리고 결국 케빈은 살인을 저지른다. 자물쇠로 문을 잠궈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활을 난사한다. 학교에서 일을 치르기 전에 아버지와 여동생도 죽인다. 오직 에바만이 살아남는다. 케빈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는 에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살인의 이유가 에바가 아닌 것은 그녀가 괴물을 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바가 비록 양육에 서투르고 어머니 역할에 충실할 순 없었지만, 케빈을 괴물로 길러낸 것은 아니다. 동시에 살인의 이유가 에바인 것은 그녀가 케빈의 정체를 의심하고 경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의심과 괴리에 묶여 케빈에 대하여 정확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케빈의 살인 사건 이후 그녀의 사회적 삶은 송두리째 무너진다. 사인회를 하던 유명한 여행가는 여행사 잡무 일자리에도 송구해하며, 이웃의, 피해자 가족의, 직장동료의 모욕적인 행동에도 대꾸조차 할 수 없다. 케빈 문제를 제외하곤 특별한 부부싸움 조차 하지 않았던 남편도, 그녀를 잘 따랐던 씩씩한 딸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간다. 영화의 제목은 여기에서 두 번째 의미를 갖는다.

  사건으로부터 정확히 2년 째 되는 날, 에바는 케빈에게 묻는다. 왜 그랬느냐고. “그 당시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케빈의 답이다. 자신을 무시하는 원천인 에바의 사회적 성공, 따뜻한 가족인척하려는 상투적인 저녁 식사, 억지로 즐거운척하는 여가활동까지, 케빈은 에바의 모든 행동을 우습게 여겼다. 그녀의 그러한 세상을 비웃고자, 무너뜨리고 승리하고자 그는 살인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무너뜨렸지만 승리하지는 못했다. 에바가 지옥같은 삶 속에서도 모진 목숨을 이어가며 그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정말로 케빈은 절대 알 수 없다.

  에바는 오히려 케빈의 살인 사건으로 자기 안의 의심과 자기 안팎의 괴리를 떨쳐낸다. 아니 떨쳐낸다기 보단 의심할 필요가 없고 괴리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는 모성 아닌 모성을 발견한다. 그것에는 모성보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적절하다. 그리고 책임은 빨간색 페인트로, 길에서 마주치는 피해자로 계속 바뀌어가며 그녀의 주위를 맴돈다. 그녀가 묵묵히 빨간색 페인트를 벗겨내는 것, 피해자 가족이 으깨놓은 계란으로 스크램블을 해먹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가 새로 발견한 모성 아닌 모성,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지는 책임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따라가며 에바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은 관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것은 에바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책임이 자신의 것인 마냥 짊어지고 있다. 그렇게 그녀는 모욕당하고 손가락질 당하지만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과연 그녀에게 양육의 책임을 돌려야 하는가? 그녀에게 지워진 책임은 정말 그녀의 책임인가? 우리는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래서 우리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앉아서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영화이다. 카메라는 에바를 따라다니지만 절대 그녀를 편들진 않는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어머니라고 하기엔 미흡한 존재, 아이를 향해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서슴없이 분노를 표출하고, 형식적인 모자 외출에 흡족해하는 모습은 낯설고 피곤하다. 그렇다고 책임 속에 살아가는 에바를 바라보는 것이 통쾌하지도 않다. 항상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거리를 걷는 걸음걸이,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칠까 조심스러운 관찰, 일어나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운 모습 역시 안쓰럽고 피곤하다. 그렇게 상영시간 내내 우리는 에바의 삶으로 시달리고 만다. 이 영화를 보고 피로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피로는 이제 우리의 삶으로 이식된다. 당신이 여성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모성을 되묻는 것 이상의 질문을 영화는 우리에게 던진다. 당신은 진실을 바라볼 자신이 있는가. 바라보고 마주하고,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에바가 마주하고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진실과, 에바가 마주하고 버티어내는 케빈의 진실은 우리가 분유(分有)하고 있는 진실이다. 그렇게 영화의 제목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다가온다. “우리는 케빈에 대하여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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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영화가 어떤 부분에서는 오이디푸스와 같아 보이는데, 엄마 혼자 살아남았다는 점, 어렸을 때 부모의 성행위를 발견했다는 부분에선 얼추 맞아떨어지지만 꼭 그렇게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케빈이 벌인 살인의 목적이 엄마에 대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엄마와의 경쟁과 승리에 더 가깝고. 결국 이 영화에서 케빈은 불가해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케빈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그저 비출 뿐.)

  (확실히 힘든 영화다. 엔딩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도 조금 쉬다가 몸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다느니 하는 쉬운 평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은 12:00에서 12:01로 넘어가는 자명종 시계다. 무얼 상징하는 것일까? 아, 힘들다고 추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본 후의 일과를 짜두면 알차게 영화를 볼 수 있다.)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변명을 해 두자면, 아이를 낳을 수 없는데다가 내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닌 이십대 남성 가운데에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한 사람은 몹시 드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한달에 두세번씩 들여다 보고 있는 돌잡이 조카가 있어서 어렴풋이 그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는 있지만, 당연하게도 온전히 내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테고. 그런데 지금 돌이켜 보면 사실 매우 가까운 곳에서 지켜봤던 그런 감정들... 이를테면 '초보 부모의 감정들' 이 있는 탓에 스스로를 적잖이 한정짓고 관람을 시작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도 거칠게 묘사가 되긴 했지만 처음 엄마, 아빠가 된 사람들의 감정이란 게 생각만큼 단순한 게 아니었던 탓이다. 무작정 사랑으로 가득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원망으로 가득찬 것도 아니니, 이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이기 전에 내가 먼저 생각한 것은... 뭐가 되었든 내가 섣불리 이해했다고 떠벌일 수 있는 감정은 아니란 것 정도? 열린 마음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는 방해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거나 조금은 경계에 선 사람의 입장에서 보게 되었달까.

 

- 많은 사람들이 '모성의 해체' 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고, 또 감독이나 원작자의 의도도 그 방향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많은 남성들에게는 사실 충격적일 수도 있는 말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니! 하지만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산모들이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이 다른 무엇보다 '징그러움' 이라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진 감상평(?)이기도 하고... 자라나는 아이가 세상 무엇보다 악마에 가깝다는 점은 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성의 상당부분이 사랑보다는 책임감에 가깝다는 점에 굳이 두 번 놀랄 필요는 없을 것도 같다. 무방비상태의 생명을 거친세상에 내어놓았을 때에는 그 생명이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뒤를 돌봐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뭐 그 뻔한 책임감 말이다. 하지만 단지 책임감만으로 그 오랜 세월을 견뎌오는 데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 상대가 애가 됐든 어른이 됐든 감정과 관계는 주고받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이 연쇄가 어디선가 비틀렸을 때 비극은 시작된다. 이 영화는 서로에게 보답받지 못한 채 평행선으로 내달리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기본 틀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에서 별로 변하지 않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저 프로그램을 꾸준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사실 진짜 문제는 언제나 부모다. 부모의 양육방식이 잘못됐거나, 생활태도가 잘못됐거나, 여하튼 부모에게서 뭔가 비틀린 감정이 전달되었을 때 아이는 비뚤어진다. 다만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는 부모 선에서 모든 상황을 제어하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황이 제시되는 반면 <케빈에 대하여>의 경우에는 그게 그렇지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건조한가? 하지만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입장에서 바라볼 때 말썽쟁이 케빈과 살인마 케빈은 정확히 같은 지평에 서 있는 캐릭터다. 영화 속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아이가 달라졌어요>를 보고 부모에게 책임을 돌리듯, 케빈의 부모에게 (너무나도 쉽게) 사태의 책임을 돌려버린다. 그런데, 이게 적절한 건가?

 

- 이 영화는 극단적이다. 모성은 선천적이지 않다. 하지만 말도 못하는 아이를 앉혀놓은 채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 고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별로 없다. 아이들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때 많은 이상 증상을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인마가 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설명은 충분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한다. 그 괴리를 메우는 것은 어찌됐건 '일어난 일' 들에 대한 감정적, 현실적 책임을 지고 있는 에바의 잔인한 일상이다. 이 일상에서도 굳이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기보다는 불길한 소리, 불길한 색깔, 불길한 표정연기(;)같은 것들이 대부분의 설명을 대신하는데, 좀 안좋게 말하자면 내러티브 외적인 요소로 '퉁치려고' 한다... 고 말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설명이 불충분한 건 아니다. 별로 잔인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유독 이 영화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조금 넘치는 것 같기도 하고.

 

- 가공할만한 감정적 격량에 부응하는 설명을 붙여놓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엘리펀트>를 닮았다.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여기저기서 살펴보는 <엘리펀트> 역시도 별다른 주석을 붙이지 않은 채 피비린내 나는 결말을 터트려 버렸다. 사실 <엘리펀트>의 시도는 그 모든 설명들이 모두 다 무의미함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폭력의 연쇄고리를 타고 올라가 건조하게 그 책임을 살피기 이전에, 당장 이 자리에서 희생된 학생들에게 뜨거운 애도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 <엘리펀트>의 의도였다 (고 나는 생각한다). <케빈에 대하여>역시도, 정확히 같은 시도를 통해 바로 지금 괴로운 일상을 '살아내고' 있는 에바에게 집중하고자 한다. 나에게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고, 내 아이가 악마였을 수도 있다. 그게 뭐 중요하단 말인가? 에바는 영화 내내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붉은 페인트를 벗겨낸다. 그리고 교도소를 찾아간 에바는 왜 그랬는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다" 는 케빈을 뜨겁게 안아주고 집으로 돌아와 방을 정리한다. 방에는 둘 사이에 단 한 번 있었던 소통의 매개체이자 대학살의 시발점인 <로빈후드>가 놓여 있다. 에바가 그 책을 어디론가 던져버리거나 불태우지 않고 가지런히 옷장 위에 올려놓을 때, 아직 에바의 내부에서도 케빈을 이해하고 받아들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아직 케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결론짓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희망적이고, 어쩌면 잔인한 현재진행형으로 막을 내린다.

 

- 결론만 말하자면 그다지 인상적인 영화는 아니었다. 아마도 시작할 때 말해둔 '한정짓기' 가 좀 안좋은 영향을 미쳤던 것도 같고... 실은 지나치게 막나가는 주인공들과 상황이 좀체 맘속에 와 닿지 않았던 탓이 크다. 에바나 케빈이나, 에바 남편이나 길거리에서 에바 뺨 때리고 지나가던 아주머니까지 정말 그 누구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저렇게 극단적이고 감정적인 사람들이 열명만 더 있어도 세상 정말 피곤하겠구나... 싶었고. 앞서 말한 <엘리펀트>의 경우에는 왜 안 그랬나 싶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실제 있었던 일이었으니까 좀 체감이 달랐던 듯.

 

- 아, 음악이 참 좋았다. 이렇게나 직설적인 영화음악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