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영화/9월의 영화 2012. 10. 7. 05:29

'피에타'의 다섯 가지 키워드

이강도

  피도 눈물도 없이 매정한 존재를 당신은 뭐라고 부를 것인가? 냉혈한? 악마? 괴물?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존재를 당신이 뭐라고 부르든 사실 큰 상관은 없다. 그 호칭은 우리 사이에서만 유의미할 뿐, 그 존재는 당신이 붙인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도 이런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피에타’를 보며 이강도에게 당신이 정한 호칭을 붙이는 데 주저할 이유는 없다. 그는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이다. 단순히 피도 눈물도 없는 게 아니라, 증오도 분노도 없으며 심지어 쾌락과 욕망도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압도적인 힘과 뚜렷한 할 일이다.

  물론 그는 숨쉬고 먹고 자는 동물이다. 인간은 동물이기에 욕망이 있다. 그러나 그는 체념한 인간이다. 이강도의 채무자 부인은 ‘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 일주일의 기한만 달라’며 속옷 바람으로 이강도 앞에 서지만 이강도는 그녀를 몇 대 때리곤 그가 할 일, 채무자의 손을 짓뭉갠 후 유유히 떠난다. 그에게 욕망은 자신을 흔들리게 할 불완전한 것일 뿐이다. 그의 동물로서의 욕망은 잠을 자며 무의식중에 하는 마스터베이션으로 충분하다.


신체

  김기덕 감독의 작품을 보는 데 어려움을 호소하는 관객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잔인함이다. 그의 이야기는 완충지대 없이 신체를 곧바로 관객에게 들이댄다. 무엇보다도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건 아무런 외피 없이 카메라를 통해 그대로 배달된 신체가 코앞에서 유린당하고 난도질당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신체는 욕망의 공간이자 기호이다. 김기덕 감독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 당연히 감추거나 더할 것 없이 그의 앵글은 신체로부터 비롯하며 역시 당연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불편함 없이 보기란 불가능하다.

  ‘피에타’에서도 역시 이강도는 등장인물들의 신체를 유린하고 난도질한다. 신체는 욕망의 공간이지만, 강도에게 욕망은 자신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고장에 불과하다. 단순한 논리로 강도에게 신체는 빈 것이 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에는 어떤 짓을 해도 아무 것도 아니므로 강도는 채무자들의 신체를 절단하고 짓뭉개는데 어떠한 죄책감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 당신이 백날 이강도에게 악마라고 불러도 냉혈한이나 괴물이라고 불러도 이강도에게는 아무 것도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강도에게 신체가 공백이기에 훼손 가능한 대상이라지만, 채무자들은 아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채무자들의 신체는 훼손 가능한 대상이 되는가? 아주 당연하고도 무시무시하게, 이강도와 채무자들을 연결하는 것은 돈이다. 이강도는 채무자의 신체를 절단하여 타는 보험금으로 사채 빚을 받아낸다. ‘지옥에 떨어져 불구덩이에 타죽을 악마’라는 채무자의 저주에 이강도는 이렇게 응수한다. ‘빌린 돈 안 갚을 생각을 하는 네 놈들은?’

  이강도의 자본주의가 비웃음당할 만한 것인지 채무자의 인간윤리가 비웃음당할 만한 것인지, 강도는 아주 당당하게 채무자에게 되묻는다. 신체를 지배하는 것은 돈이며, 신체를 사용하여 돈으로 교환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신체를 사용’이라는 구절의 활용 범주를 조금 더 늘려본들 어떠하겠는가? 이강도에겐 신체를 절단하여 보험금을 타 사채를 갚는 것은 ‘신체를 사용’이라는 구절이 가진 논리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신체를 돈으로 환원한다.


엄마

  이 신체와 돈의 연쇄 고리는 어느 쪽에서도 끊을 수가 없다. 이강도에게는 이 자본의 논리를 벗어나야할 필요성과 계기가 결여되어 있으며, 자본의 논리에 갇혀 버둥대는 채무자들에게는 일종의 필요악이 되어버린, 벗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이다.

  채무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세 가지이다. 이강도를 그저 욕하고 원망하거나, 이강도의 영향력 밖이자 존재의 범위 밖으로 달아나거나, 오히려 이강도의 논리에 아주 강하게 호응하여 자신의 신체를 자신이 절단하거나. 이 선택지들은 행렬의 결과물인데, 이강도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선택지는 적극적이거나 울며 겨자 먹기일 수 있다. 반면에, 이강도라는 현실을 벗어나는 순간 선택지는 사라진다. 비어있는 행렬, 이강도는 엄연한 현실이며, 벗어날 수 없다.

  이 공백의 행렬을 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그리고 엄마가 등장한다. 30년 만에 나타난 엄마라는 존재는 이강도의 세계를 유리창 깨듯 깨버린다. 이강도의 세계에는 엄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강도의 세계에서 가능한 방법으로 엄마임을 증명할 수는 없다. 때려도, 협박해도 엄마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부분을 먹여도 보고 최후의 방법으로 성적 위협도 해보지만 엄마는 꿈쩍도 않는다. 공백의 행렬에서 공백을 채우는 존재가 나타났다. 이강도의 현실 밖에 존재하면서 이강도를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있는 사람, 엄마. 영화는 이렇게 '피에타'를 호출한다.


복수

  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어머니의 존재를 각인하기 위한 상징으로 21세기까지 반복하여 등장한다. 그러나 이번 영화의 피에타는 또 다르다. 이 성모 마리아가 이강도에게 접근한 이유가 그녀가 그의 엄마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 아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강도는 사라진 엄마를 찾기 위해,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대상이었던 채무자들을 다시 찾아간다. 그의 엄마를 찾는 여정에서 실제로 그가 발견하는 것은 그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들이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 죽거나 묵묵히 복수를 다짐하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이강도를 만나서도 칼을 휘두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이강도의 세계 안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마들은 다르다.
  복수는 이루어진다. 엄마는 폐건물에서 뛰어내린다. 스스로 목숨을 저버림으로써 복수를 완성한다. 이강도가 무릎을 꿇고 엄마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그녀는 그를 애달프게 내려다본다. 그녀의 아들만큼이나 이강도 역시 불쌍하다며, 어떡해야 하냐며. 슬피 운다. 하지만 그녀는 뛰어내린다. 돌아갈 길은 없다. 복수는 이루어졌다. 그러나 복수의 주체 자리는 비어있다. 이강도도, 엄마도, 채무자들도 행해진 복수의 수혜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복수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복수의 의미는 어디로 향하는가?


다시 엄마

  이강도가 엄마를 찾으러 다니며 다시 만나는 채무자들은 여전히 이강도의 세계 안에서 살지만, 이강도는 이제 더 이상 그의 세계에서 살지 않는다. 그에게 남은 결론은 자살만이 유일하다. 자신의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채무자들은 칼을 갈지만 휘두르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세계의 밖으로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나온, 그러나 엄마 잃은 외톨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는 자신의 손으로 짓뭉갠 채무자의 삶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이제 그는 냉혈한이고 악마이고 괴물이다.
  마지막으로, 복수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자. 엄마가 뛰어내리기 전에 카메라는 다른 엄마를 비춘다. 그녀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나타났고 자결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이강도의 엄마를 건물에서 떠밀려 한다. 다만 다른 엄마는 이강도의 엄마를 떠밀 수 없다. 사실 복수는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는 복수를 하기 위해, 이 절망적인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복수 속에서는 이강도도, 엄마도, 채무자도 수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강도가 만들어 둔 세계, 아니 이강도가 스스로 체화한 세계의 안팎으로 왕복할 수 있는 존재를 감독은 질문하고 대답한다. 피에타는 이렇게 세상이라는 깊은 절망 속에서 아주 잠시, 드러난다.